부처님께서 투시타 극락에서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때 괴로움이 많은 인간세계에 내려가 중생의 삶을 안온케 하리라는 사원을 세우고 지금의 네팔 땅 따라이 지방을 다스리는 카필라국왕 숫도다나와 부인인 마야왕비를 부모님으로 이 땅에 탄생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의 원력이 오늘의 불교를 탄생시켰습니다. 여기서 전생이란 말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생을 말합니다. 전생의 개념을 넓게 해석하면 지나간 모든 일들을 전생일이라고도 합니다.
바로 전 혹은 지난 시간, 지난 해, 지난 생이 모두 전생입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성년의 전생은 아기였고 장년의 전생은 어린 시절이었고, 노인의 전생은 청춘입니다. 이렇게 살아온 내력이란 한 생을 말하지 않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수한 전생의 끈들이 나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서원인 “중생의 삶을 안온케 하리라”는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안온케 해주시는 전지전능자가 아니라 중생이 그 자체가 이미 부족함이 없는 ‘참나’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삶의 궁극적 목표는 이 ‘참나’를 깨달아 영원행복을 성취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재산, 권력, 건강 등을 지키기 위해 무척 애를 씁니다만 이런 것들은 생명이 태어난 후에 얻어지는 삶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진정으로 지켜야할 것은 이러한 외부적인 조건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무시하라는 뜻은 더욱 아닙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필요한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며, 그 무엇도 ‘참나’를 깨닫는 일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권세는 하루아침에 잃을 수도 있고, 재산 싸움에 몰릴 수도 있고, 각종 질병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참나’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일이란 좋고 나쁨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만 그렇게 판정하고 판단하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중생심이 불심이라고 했습니다. 중생의 삶 속에서 ‘참나’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암흑지옥입니다.
온갖 질병과 재앙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고(苦)에서 벗어나도록 정진할 때 삶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지금 코로나19라는 질병으로 온 세계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한가운데 있는 우리의 이웃에 손을 내밀 때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지금의 고통은 누구 한사람의 고통이 아닙니다. 이럴 때 나를 놓아버렸을 때 진실한 내가 싹을 틔웁니다.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씩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치셨습니다. 부처님의 탄생게는 ‘참나’로서의 나를 말합니다. 깨달음의 분상에서 본다면 우리는 모두 싯다르타입니다.
‘참나’는 본래 부처이기에 모든 것은 이미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이 괴로울지라도 ‘참나’를 깨달아 일체의 악을 제거하고 찬한 업을 증장시켜 몸과 마음을 극락으로 장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