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사사 법당 주지스님
임진왜란 시기 국난 극복을 위해 참전했던 군대는 성격상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관군과 의병, 의승(義僧) 등이 그들인데 이 가운데 관군과 의병은 의무적이면서 당위적 성격이 짙은 군대에 속한다.
반면, 의승 또는 의승군으로 칭해지는 승려 군사집단은 철저하게 자발적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 군대라는 특성을 지닌다. 특히 이들 의승 활동은 연산군-중종대라는 조선왕조 최악의 불교탄압기를 거친 이후 피지배계층에 의해 전개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임진왜란 시기에 전개된 의승 활동은 일반사적 측면과 불교사적 측면 모두에서 그 소중한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의승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있어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의승은 그야말로 급조된 성격의 군사집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과정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기허 영규(騎虛靈圭), 사명 유정(四溟惟政), 뇌묵 처영(雷黙處英) 등으로 대표되는 의승장과 의승들의 활동은 조선왕조를 지켜내는 일 뿐만 아니라, 도탄에 빠져 있던 백성들의 삶을 구해낸 구제행(救濟行)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17~18세기 조선 불교는 이전 시기와 확연히 달라진 양상을 보이게 된다.
서산대사는 1520(중종 15)년에 태어났으며, 속성은 최씨(崔氏), 본은 완산(完山)이다. 아명(兒名)은 여신(汝信)이며, 자(字)는 현응(玄應)이었다.
출가한 이후 법명은 휴정(休靜)이며 법호(法號)를 청허(淸虛)라 하였고, 수행 및 정진 처소의 인연에 따라 묘향산인(妙香山人), 두류산인(頭流山人), 백화도인(白華道人) 등의 자호(自號)를 붙였다. 특히 스님은 오랫동안 묘향산에 주석하였기 때문에 서산(西山)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서산대사는 1589(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결백이 밝혀져 선조의 명으로 석방되었다.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패퇴하고 임금마저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렇게 나라가 위태로워질 때 73세의 서산대사는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으로 임명받아 여러 제자들에게 격문을 내려 의승의 봉기를 독려하였다.
스님의 문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의승군은 서산대사의 지휘로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며, 왕이 환도한 후에는 제자 사명과 처영에게 총섭의 일을 부탁하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대사의 나이 많음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법호와 함께 정이품(正二品)의 품계를 하사하였다.
묘향산으로 돌아온 서산대사는 산 중에 있는 원적암(圓寂庵)에서 그해 겨울을 나고 1604(선조 37)년 85세의 정월을 맞이하였다.
정월 23일, 대사는 산내의 모든 대중들을 모이게 하였으며, 깨끗이 몸을 닦고 위의를 갖춘 이후 대중들 앞에서 최후의 설법을 하였다. 설법을 마치고는 자신의 영정을 집어 들고 그 뒤쪽에 “80년 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그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 이후 대사는 결가부좌하고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1604(선조 37)년 세속 나이 85세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니 보현사와 안심사(安心寺), 대흥사 등에 부도를 세웠다.
서산대사는 1540년, 21세의 나이로 정식 출가하였다. 이후 1604년 입적할 때까지 그는 무려 65년이라는 세월을 승려로 살았다.
스님의 일대기에서 참전을 결행하고 승군을 통섭(統攝)한 기간은 불과 2~3년 남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사문 휴정’이 아니라 ‘호국승병장 휴정’으로서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그것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역사에 남긴 그의 자취가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본 원고는 해남 대흥사에서 주관하는 서산대사 탄신 500주년 기념 특별전 「위대한 호국 호법의 자취」의 전시도록 내용을 전재(轉載)하였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