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 휘날리니 여자들은 비틀즈 심쿵심쿵 만든 오노요코를 꿈꾸고...
홀로 가슴태운 로맨스도 역사로 남고
- 잡지 리디북의 유대란 작가가 본 세기의 로맨스
Romance. 우리는 이를 ‘낭만’이라 읽는다. 그 어원은 불어의 ‘Roman’, 즉 소설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Roman’이라는 단어는 ‘로마적인’ ‘로마인’ ‘로마의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유럽 중세시대 때 사용한 ‘로마어’에서 그 어원을 다시 한 번 찾을 수 있다. 당시 라틴어는 텍스트에 주로 사용됐고 대화를 할 때는 로마어를 사용했다. 특히 라틴어는 종교와 글을 읽는 특정 계층에서만 사용됐기에 이를 이해하고 읽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에 대중에게 글을 보급하기 위해 대화로 사용되던 로마어를 책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종교 문서에서 시작해 내레이션이 많은 이야기들이 로마어로 기록됐다.
또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점차 기록됐다. 이것이 바로 로맨스가 탄생한 배경이며 로마어에서 점차 변화되어 소설이라는 하나의 장르로 발전한 과정이다.
우리의 이성은 연애 감정의 생물학적 유효기간이 2년 남짓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기까지 이르렀고 오지 오스본도 ‘굿바이 투 로맨스(Goodbye to Romance)’라고 노래했다.
그런데 어떤 로맨스는 역사를 바꾸고, 영화로 만들어지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꿈꾸게 한다. 수많은 장르에 걸쳐 셀 수 없이 반복되고 재생산됐지만 다시 보고, 다시 들어도 가슴 뛰는 로맨스의 원형들, 그 주인공들을 되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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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의 예술적 주파수를 감지한 두 사람, 오노 요코와 존 레논 세계에서 가장 미움 받은 여성을 꼽는다면 오노 요코는 순위권에 들고도 남을 거다.
그녀의 죄목은, 의도한 바든 아니든 비틀스 멤버 간 불화를 부추긴 점, 그래서 결국 존 레논이 비틀스를 떠나고 밴드가 해체된 데 일조한 것. 팬의 입장에서는 이런 오노 요코가 곱게 보일 리 없다.
그러나 그녀가 존 레논에게 대체할 수 없는 연인, 절친한 친구이자 예술적 스승이며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존 레논은 오노 요코를 만난 후 친구에게 털어놨다. “바로 이거였어. 내가 평생 기다려 왔던 것. 나는 이제 탈출하겠어.”
레논과 오노가 만났을 당시 비틀스는 세계적 인기를 얻은 후였고 레논은 신시아 파월과 결혼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런던의 ‘인디카’라는 화랑에서 처음 만났다. 화랑의 주인 존 던바는 그곳을 방문한 레논에게 뉴욕에서 온 일본 여자가 어떤 ‘해프닝’을 보여줄 거라고 귀띔했고 레논은 섹스와 관련된 흥미진진한 것을 보게 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레논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60년대 세계적으로 번지기 시작한 아방가르드 예술의 선구자였던 오노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이상한’ 것들을 보여줬다.
좌대 위에 놓인 사과, 못이 가득한 가방이 전시됐다. ‘망치와 못’이라는 작품은 판자에 연결된 사슬 끝에는 망치가 달리고 판자 하단에 여러 개의 못이 뿌려져 있는 형상이었다.
반항적이고 장난기 충만한 레논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그는 망치로 못을 박아봐도 되겠느냐고 오노에게 물었다. 대답은 영락없이 ‘노’였다.
그러나 레논이 작품을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화랑 주인은 오노를 설득해 들은 대답은 못 하나에 60실링을 내면 못질을 허용하겠다는 것. 이에 레논은 대답했다. “그러면 내가 못 한 개당 상상의 5실링을 내고 상상 속에서 못질을 하죠.”
레논이 깊은 인상을 받은 작품은 사다리를 이용한 작품이었다.
사다리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설치된 작은 망원경을 들여다보면 ‘Yes’라는 깨알 같은 글씨가 보였다. 때려부수고, 던지고, 깨는 것이 마치 공식처럼 통용되던 아방가르드 예술신에 염증을 느끼던 레논은 ‘Yes’에서 새롭고 긍정적인 영감을 받았다. 그는 거기서 자신과 오노의 예술적 주파수가 통함을 감지했다.
- 1969년 암스테르담의 힐튼 호텔에서 열린 침대시위 Bed-in For Peace
레논은 오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상상 가능한 모든 면에서 나와 일치하는, 아니 더 나은 사람이다. 그녀를 만나기 전의 삶은 ‘전생’이나 마찬가지다.” 상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만족을 얻지 못했던 레논은 지적 자극과 영감을 줄 여자와 함께하기 위해 그간 이룬 모든 것을 포기할 심산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기류를 본인들보다 먼저 눈치챈 것은 레논의 부인 신시아였다.
신시아는 자서전에도 기록했다. “존과 요코를 원망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영혼과 육체는 마치 하나와 같았고 그것은 내가 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요코는 존을 뺏은 게 아니다. 왜냐하면 존은 한 번도 내 것인 적이 없었으니까.”
오노와 레논은 둘의 사이를 숨기지 않았다. 어디든 동행하고 모든 걸 같이 했다. 레논이 조강지처를 버린 것이 낯선 동양 여자 때문이었다니. 영국 사회는 경악하고 비난했다. 일부는 인종차별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비틀스가 해체됐을 때 비난은 더욱 거세졌으나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가 열어주는 예술적 영감의 세계에 몰두해 있었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반전운동에 힘썼고 주류와 구태의연함에 대항하는 예술의 역할에 활기를 부여했다. 소울메이트를 만난다는 건 이런 예술적 주파수가 맞는 서로를 발견하는 일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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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적인 자유연애의 표상,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20세기 최고의 지성 커플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드 보부아르. 잘 알려진 대로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의 기수,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의 저자이자 여성 해방의 선구자다.
이들을 떠올리면 파리의 생제르망데프레 지역의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이곳에는 카페 레 두 마고, 카페 드 플로르 같은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가게들이 밀집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 지역은 작가, 화가, 배우, 뮤지션들의 집결지가 됐다.
재즈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소속을 거부하고 선택에 의해 떠돌이처럼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모여들였다. 그들은 거기에 모여서 새로운 사회와 예술에 대한 열망을 논했다.
이곳을 배경으로, 1945년 사르트르는 보부아르, 레몽 아롱 등 여러 문인들과 모여 <레 탕 모데른>(Les Temps Modernes. ’현대’라는 의미)을 창간했다. “작가는 그의 시대라는 상황 속에 살고 있다”라는 창간사를 필두로 이들은 사회변혁을 꿈꾸었다.
전후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고자 했던 이들은 전장의 전사들 못지않게 치열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물론 이들의 무기는 총이나 칼이 아닌 펜이었고, 지식과 이성, 그리고 서로가 지원군이 돼 주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1929년 대학에서 만나 연인이 됐다.
사르트르는 외모가 출중하지는 않았지만 보부아르는 그의 뛰어난 지성과 강인한 성품을 존경했다. 낡은 관습에 얽매이는 걸 거부했던 두 사람은 파격적인 방식의 연애를 택했다. 서로를 연인으로 사랑하고 존중했지만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허용했다.
이런 방식을 먼저 제안한 건 사르트르였고 보부아르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들의 연애관은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정작 본인들은 자유로운 연애 방식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으로 여겼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특별한 관계가 지속될 거란 확신이 있었고 오직 한 사람만을 만난다면 다른 여러 사람을 만나는 데서 오는 경험의 풍부함까지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점을 알았다.
이들은 연애의 배타적이고 한정적 속성을 거부했다. 두 사람은 결혼도 동거도 하지 않았다. 대신 평생 한 가지 약속에 충실했다. 그 약속은 서로에게 어떤 거짓말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사르트르가 먼저 사망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각자의 삶과 저술, 정치관, 감정, 심지어 연인까지 공유했다.
두 사람은 모든 저술을 서로 보여줬고, 각자의 저술에 대한 냉철한 평가를 듣고 편집을 맡기길 마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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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묘비. 그들의 사랑을 기리는 이들의 입술 마크가 남겨져 있다. Photography ⓒ sarahstierch / Foter / CC BY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연애관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것은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하거나 방향을 결정할 때 사회적 규범이나 절대적 가치라고 여겨지는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개인이 자유롭게 그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실존주의 철학의 기조와 닮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평생에 걸쳐 추구했던 실험적인 삶의 방식과도 상통한다. 이런 삶의 방식은 두 사람의 철학적 저술과 소설에도 반영돼 있다.
혹자는 불안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연애가 이들에게 과연 행복을 가져다 줬을까 의심하지만 보부아르는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행복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관심사는 무엇이었을까.
관습과 삶의 방식을 거듭 실험해 보고서야 얻을 수 있는 지적 성취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의 다른 이름은 자유일 거다. 이들의 관계가 더 낭만적일 수 있었던 건 이 자유 때문이다.
어떤 심적 의무가 주어지거나 법적으로 종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주체로서 상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태, 그리고 그런 자유로운 주체로부터 선택받는다는 것만큼 낭만적인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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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을 향한 순애보, 백석과 자야성북동에 위치한 아름답고 호젓한 사찰이 있다. 길상사라고 불리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뇌리에는 자연스럽게 한 이름이 스친다. 자야(子夜). 백석 시인의 연인으로 알려진 자야 김영한이다.
두 사람은 1936년, 김영한이 속해 있던 기방에 백석이 회식을 오며 만나게 됐다. 김영한은 일본 유학을 한 인텔리였지만 집안이 망한 후 기생이 됐고 백석은 당시 함흥의 영생고보 영어 교사였다. 당시 26세 였던 백석과 22세였던 김영한은 첫눈에 서로에게 반했다.
시인 백석. 김영한은 회고록에서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단 한 번 부딪힌 한순간의 섬광이 바로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매듭이 없는 슬픈 사랑의 실타래는 이미 그때부터 풀려가고 있었다.”
백석은 퇴근 후 김영한의 집을 자주 찾아 밤을 지새우곤 했다. 백석은 ‘자야’라는 호를 지어줬다. 중국 시인 이백의 ‘자야오가’에서 따온 것이었다.
김영한의 신분이 못마땅했던 백석의 부모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석은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지만 김영한을 잊지 못하고 그녀를 찾아왔다. 백석은 부모의 독촉에 두 번째 혼례를 치르지만 또다시 김영한에게 돌아왔다. 1939년, 백석은 김영한에게 만주로 동행하자고 하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그는 2년 뒤 세 번째 결혼을 했다.
백석은 만주에서 살다가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과거에도 그랬듯 언제든 김영한에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남북이 분단되자 그럴 수 없었다. 백석의 시는 한반도 이남에서 금지당했고 1987년에 들어서야 해금 조치됐다.
2년 뒤인 1989년 김영한은 백석과의 관계를 고백한 회고록을 발간했고 1997년 백석에 대한 그녀의 변함 없는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 백석문학상을 제정했다.
그녀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을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 이문에 밝았던 김영한은 서울의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의 주인이자 수천억 원대의 자산가가 됐고,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대한 가르침에 깊이 감화된 후 1000억원대의 대원각 부지와 건물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는데 이것이 현재의 길상사다.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 “어느덧 팔순이 가까운 내가 만상이 고요히 잠든 깊은 야심경에 혼자 등불을 밝혀놓고 당신과의 애틋했던 기억의 사금파리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그 동안 줄곧 이 글을 써내려 왔다. 이렇게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 올 양이면 나의 두 볼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적시어지고, 급기야 눈물은 원고지 위로 뚝뚝 떨어진다.” ─김영한 <내 사랑 백석> 중
김영한은 한 인터뷰에서 1000억원의 재산이 백석의 시 한 줄만 하겠냐고 이야기했다.
백석이 활동하던 당시 그의 시는 발표될 때마다 화제를 낳았고, 그의 작품을 수록한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 백석은 서른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알려졌다.
그의 시는 당시 모더니스트로 불리던 서구적 취향의 시인들의 작품과 사뭇 달랐다.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그의 시에는 북녘의 토속성이 짙게 배어 나왔다. 그런 와중에도 그가 보여준 극도의 절제미는 모더니스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석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그가 러시아에 있을 때 쓴 시다.
그가 그리는 ‘나타샤’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나타샤’가 백석이 김영한을 만나기 전 흠모했던 ‘란’이라는 여성인지 김영한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백석과 보낸 3년이라는 시간으로 평생을 버틴 자야의 지순한 사랑은 독자로 하여금 그녀가 백석의 마음속 ‘나타샤’였기를 간절히 바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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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죽일 놈의 사랑, 시드와 낸시1978년 10월 12일, 오전 11시께 뉴욕의 첼시 호텔에서 피범벅이 된 젊은 여성의 사체가 발견됐다.
호텔 방에는 다량의 마약과 피 묻은 칼이 놓여 있었다. 이 여성은 20세의 낸시 스펀젠이었다. 영국 펑크밴드 섹스피스톨스의 베이시스트 시드 비셔스의 애인이었다.
시드 비셔스는 호텔 복도에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그녀를 죽였어… 나는 그녀 없이는 살 수 없어.” 시드는 약에 취해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낸시가 죽기 전까지 두 사람은 보헤미안의 아지트처럼 여겨졌던 맨해튼의 첼시호텔에 살고 있었다.
시드와 낸시 커플이 헤로인 중독자라는 건 뉴욕 일대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시드 비셔스가 밴드 활동을 그만둔 후 커플은 뉴욕으로 건너와 매일같이 마약에 취해 도시를 휘젓고 다녔다.
낸시의 죽음이 세간에 알려지자 젊은이들은 술렁였다. 젊은이들이 추앙했던 섹스피스톨스, 그 중에서 도시 드비셔스는 반항과 불량함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반항이 아무리 젊음의 특권이라 해도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극단적인 상황은 젊은 펑크 팬들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시드는 살인 혐의로 조사를 받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에도 마약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마약 과용으로 사망했다.
시드 비셔스는 섹스피스톨스의 매니저였던 말콤맥라렌에 의해 픽업됐다. 맥라렌은 시드를 보자마자 그를 밴드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드가 악기를 못 다룬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형편없는 연주 실력은 밴드의 우상 파괴적인 성격과 오히려 잘 어울렸다.
시드의 불량한 태도, 깡마른 몸매, 자기 파괴적인 태도는 맥라렌이 생각하는 펑크 정신 그대로였다. 맥라렌의 계획대로 밴드는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시드 비셔스는 곧 헤로인 중독에 빠지고 나락의 길을 걸었다. 무려 열세 살 때부터 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 낸시를 만난 후 두 사람의 중독적 성향은 증폭된다. 두 사람은 섹스피스톨스의 공연에서 만났다. 낸시는 공연을 보러 온 열성 팬 중 한 명이었다.
낸시는 시드 못지않게 폭력적이고 독단적인 성향을 보였다. 낸시의 별명은 ‘욕지기 나는 낸시(nauseating Nancy)’였다.
시드와 낸시. 두 사람은 만나는 순간부터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됐다. 둘은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의 결핍을 채워줬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시드는 자신을 쥐고 흔드는 엄마 같은 역할의 낸시에게 끌렸고, 어릴 적부터 파괴적인 성향을 보였던 낸시는 시드의 육체와 정신을 뒤흔들어놨다. 밴드의 멤버 조니 로튼은 시드에게 낸시와 헤어질 것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시드가 세상에서 말을 듣는 유일한 사람은 낸시였다.
커플은 뉴욕으로 건너와 마약에 탐닉하며 일탈을 즐겼다.
그들이 묵는 호텔 방 매트리스에 불을 지르고 걸핏하면 싸움을 걸고 폭력을 휘둘렀다. 시드의 매니저를 자청한 낸시는 유명 록 클럽에서의 공연을 잡아주기도 했다. 60년대 벨벳언더그라운드가 공연했던 맥스 캔자스 시티(Max’s Kansas City)라는 클럽에는 이전 섹스피스톨스의 멤버가 온다는 소식에 많은 인파가 모였지만 약에 전 시드는 무대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두 사람은 헤로인을 끊기 위해 치료센터를 찾았지만 시드의 불량한 태도가 다른 환자들의 미움을 사며, 그는 잦은 구타를 당했다. 결국 둘은 치료를 포기했다. 두 사람은 첼시호텔에 머물며 예전처럼 서로에게 폭언과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 시드의 기타에 맞은 낸시는 턱에 큰 멍이 들었지만 웃으며 넘겼다고 한다. 두 사람의 중독과 불안 증세는 점차 심해졌고 낸시가 죽던 날까지 약을 찾아 다녔다. 그녀가 죽은 후 시드는 여러 번 자살을 기도하다가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결핍에는 매력적인 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는 항상 결핍을 채우고 싶어하고, 채워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기 파괴로 이어질 수 있는 의존적이고 중독적인 면이 도사리고 있다.
2020년 3월 25일 제 1040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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