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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의 한 분파였던 초기 기독교
- 김 상 열 목포남부교회 원로장로
1. 박해를 받은 초기 기독교
초기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은 원인은 예배의식에 대한 로마인의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비밀리에 모여 예배 보는 모습에서 ‘식인풍습과 근친상간 그리고 무신론’이 의심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신자들이 서로를 향해 형제, 자매라 부르는 초대교회 관습은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예배 후 ‘평안의 키스’를 나눈다는 표현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예수의 몸과 피를 마신다’는 성찬식 표현은 말 그대로 기독교인들이 식인 풍습을 지닌 것으로 와전되었습니다. 게다가 교인의 갑작스러운 증가로 그 존재감이 부각되었을 뿐 아니라 이방인 세계에 급속히 전파되어 로마인들에게 국적 불명의 종교로 인식되었습니다.
로마에 대항한 유대인의 세 차례 봉기로 인한 불똥이 기독교인들에게까지 튄 것입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전하는 기독교인들은 또 다른 반역을 선동하는 무리로 의심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이 핍박받은 가장 큰 이유는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에게는 눈에 안 보이는 ‘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무신론자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로마제국의 수호신인 황제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곧 제국의 안녕을 위협하는 반국가적 행위였습니다.
자연히 로마에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기독교인은 비난의 대상의 되어 사자 밥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박해는 네로 황제 때부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네로 황제가 재임하던 서기 64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 는 기독교 역사상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네로는 화재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고 극심하게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반인들도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네로는 자연스럽게 화재 사건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릴 수 있었습니다.
로마 화재 사건으로 네로는 많은 그리스도인을 죽였습니다. 4세기의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도 네로의 ‘극단적인 광기’가 그의 생모와 아내,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유대교와 기독교가 갈라선 이유 유대교와 기독교가 처음부터 반목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는 오랜 기간 사이좋게 예배를 같이 보았습니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뿌리가 같았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 유대교의 한 분파인 ‘나사렛파’로 존재했습니다. 그 무렵 로마와 3차에 걸친 전쟁 막바지에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일전이 있었습니다. 68년 로마 군의 예루살렘 성 포위를 보고 임박한 세상의 종말을 확신한 유대 기독교인들은 요르단 강 동편 펠라 성으로 집단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임박한 종말신앙 속에 살아간 유대 기독교인들은 로마 군의 예루살렘 포위가 임박하자 예수의 말을 기억했습니다.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눅21:20~21) 예수의 혜안이 기독교인들을 살린 셈이다.
하지만 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탈출로 목숨을 연명한 이들의 행동은 유대인들에게는 정죄의 대상이 되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나사렛파를 비겁한 배신자들로 여기며 곧 운명을 걸고 신앙공동체를 함께할 수 없다고 보았다.
3차에 걸친 로마와의 전쟁 후유증으로 유대민족의 삼분의 이가 멸절되어 거의 모든 종파가 와해되고 바리새파만이 남았다.
전쟁 통에 제사장 계급이 전멸당해 사제가 없어지자 이른바 랍비들이 주도하는 랍비 유대교가 자리 잡았다.
유대인들은 유대 왕국이 로마제국에 의해 무참히 박살난 이유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충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특히 종파 간 교리 싸움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랍비들은 율법 논쟁은 용인하나 종파적 논쟁은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이단들에 대한 저주’의 기도문으로 나타났습니다. 랍비들은 성전이 없는 세계에서 종파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멸망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서기 90년 야브네(얌니아) 종교회의에서《구약성경》을 확정하면서, 사무엘 랍비가 회당 예배 때마다 바치는 18조 기도문 가운데 이단자들을 단죄하는 제12조에 ‘나사렛 사람들’ 곧 기독교인들을 덧붙였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도들은 더 이상 유대교 회당 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독자적 종단으로 독립했습니다. 이 조항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사렛 사람들과 이단자들을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는 이들의 책에서 그들을 지워버리시어 의인들과 함께 쓰여 있지 않게 하소서. 무엄한 자들을 굴복시키시는 하느님, 찬양받으소서.”
3. 지하묘지 예배당, 카타콤
서기 200년부터 기독교인들은 로마 시내의 카타콤이라는 지하묘지 동굴에서 은밀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나 죽은 기독교인들을 추모하고 장사 지냈습니다.
카타콤은 2세기경부터 로마 시내 지하에 조성되기 시작한 묘지입니다. 로마인들은 전통적으로 화장을 선호했는데,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화장보다는 매장을 선호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하층민과 노예들이라 묘지로 쓸 땅을 살 만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로마는 로마 시내에 묘지를 만들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부자들만이 로마에 무덤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시는 단단하지 않은 화산암 위에 세워져 있어 쉽게 동굴을 파내려 갈 수 있었습니다.
한번 파여진 동굴은 공기에 노출되어 단단하게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로마의 가난한 기독교인들은 지하 깊숙이 로마의 대로를 따라서 긴 터널을 파내려 가기 시작했습니다. 카타콤은 지하 7미터~19미터 아래에 3~4층으로 지어졌고, 통로는 2.5미터 높이에 1미터 넓이였다.
그리고 통로의 벽을 파서 40~60센티미터 높이에 120~150센티미터 길이로 벽에 공간을 내고 시신을 묻었습니다.
2020년 3월 25일 제 1040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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