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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활동 통해 어려운 이웃 돌아보는 삶 추구”
육군3사관학교 출신 육군소령 전역 후 교사생활
- 이호연 전 재목 해남향우회 회장
"교사생활을 하면서는 시간제약도 많고, 재정적으로도 힘들어 봉사활동이나 사회활동을 많이 하지 못했는데 퇴직 후 다양한 활동을 통해 어려운 이웃들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돼 보람을 느낍니다"
해남화원의 작은 오지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장남으로 태어난 이호연 전 해남 향우회장은 "어린 시절 너무 집이 가난하다보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야하는데 아버지께서 너는 장남이니 중학교를 가지 말고 농사를 지어 동생들을 가르치자는 말에 오기가 생겨 초등학교 6학년 때 밤 12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면서 4km가 넘는 길을 캄캄한 밤에 혼자 걸어 다니면서 공부를 해 중학교를 가게 되었다”며 “중학교를 다니면서 면 소재지에서 자취를 하면서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도 못 가게 했지만 내 의지로 고등학교를 진학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3때 가난한 집안 형편을 생각해 교육대학을 가려다 친구가 육군3사관학교를 가면 장기복무하면서 돈도 안 들고 학교를 다닐 수 있다고 해서 3사관학교를 가게 되었다”며 “여러 명의 친구가 같이 시험을 봤으나 친구들 중 나 혼자만 합격해 바로 군대를 가게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회장이 직업군인이 된 계기였다.
그는 1974년 12월 21일 육군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계급장을 달고 전 후방에서 12년 동안 군 생활을 하다가 1987년 11월30일 육군소령으로 전역했다.
의지와 끈기가 남달랐던 이 회장은 군 생활을 하면서 군 전투력 증강에 기여한 공으로 보병 제2사단장 표창은 물론 업무에 성실히 수행해 보병 제52사단장표창, 예비군 육성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서울특별시장표창, 수도방위사령관 표창 등 수십 개의 표창은 그의 성실함과 노력을 증명해주고 있다.
늘 부모님이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이 회장은 군 전역 후 부모님과 같이 살기위해 바로 목포로 내려와 전역 후 5개월 만에 부모님을 목포로 이사 하시게 했다. 당시 집도 없이 전세살이를 하던 그였지만 부모님이 더 이상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고생하시는 모습이 싫어서 무작정 모시고 온 것이다.
이 회장은 시내 삼광서점 앞에서 시너바 신발가게를 열었다. 그의 가장 큰 인생의 목표는 첫 번째가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목표가 돈을 벌어서 훗날 나의 자식들한테 이 어려움을 전가시키지 않아야겠다는 것으로 이미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마음에 새겼던 목표였다고 한다.
전역 후 부인에게 신발가게를 맡기고, 본인은 당시 목포역 옆에 도깨비시장에서 신발노점상을 시작했다. 리어카를 끌고 시장에 나간 것이다. 이 회장은 “과거 군에서의 나의 직위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며 “열심히 살면 나도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을 가지고 꿈은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이 회장은 이후 1990년 문태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도 노점상을 계속했다.
그가 학교에서 근무하는 시간에는 동생이 노점상을 지켰고, 그는 퇴근 후 토요일에는 양복을 입은 채로 자유시장 노점상으로 달려가 동생과 같이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다. 그를 도와 함께 노점상을 했던 동생이 현재 하당 시너바슈즈마트를 운영하는 그의 막내 동생이다.
22년 교사로 재직하면서 국민 교육발전에 크게 공헌한 공으로 전남도교육감표창, 교육인적자원부 장관표창 등 무수한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퇴직 후 교육자로 재직하는 동안 헌신적으로 봉사해 교육발전에 이바지한 공으로 2012년 옥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
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무엇이든지 하려고 노력했다는 이 회장은 "그만큼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학교를 2012년 2월말 정년을 3년 6개월 남겨놓고 명예퇴직하고 시간과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어지자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하면서 어려운 이웃도 돕고 노년을 즐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됐다."며 "슬하에 아들 셋은 훌륭하게 성장했지만 아버지가 열심히 살아온 삶을 세 아들에게 남겨주고 싶어 칠순 기념으로 자서전을 내려고 준비 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30년 신발가게를 하면서 20년 동안은 일 년에 하루도 쉰 적이 없다. 열심히 해서 돈이 모아지면 상가를 위한 땅을 샀다. 땅을 사서 건물을 지어 임대를 내줬다.
이 회장은 “지금 와서 나이 먹고 생각해보니 너무 잘했다고 생각한다"며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 같으면 아파트를 샀을 건데 남의 집에서 전세로 살면서 상가자리 나대지를 사서 직접 건축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연산배드민턴 클럽회장, 평화라온스클럽럽회장,목포대학최고경영자과정25기회장, 라이온스 백년사자회회장, 라이온스B2골프사자회회장, 문태고 교사퇴직자회장, 원산중앙상인협회회장, 재목 해남향우회장, 재목 해남향우골프회도 조직해 초대회장을 했고, 육군3사관학교 서남부지회회장 등을 맡아 봉사하기도 했다. 그는 남다른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그의 가장 큰 보람은 아들 삼형제를 어려운 환경에서 훌륭하게 키웠다는 것이다.
큰 아들은 이 회장의 뒤를 이어 사업을 하고 있고, 둘째는 국민대 수학과를 졸업 후 다시 조선대 치대 대학원에 진학해 오는 2월 25일 졸업을 앞두고 있다. 이제 치과의사로서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
막내아들은 경희대 의상학과를 수석 졸업 후 졸업작품전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서울 동대문 두산타워 주관 전국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아 상금 1억을 받고 두산타워 매장 일 년 무상으로 들어가 가게를 하기도 했다. 탑 디자이너 이창섭으로 지금은 아들의 브랜드 BIBY SEOB(바이바이섭)으로 창업해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창섭 디자이너의 작품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이 회장은 "30년 동안 신발가게를 하면서 고생한 집사람과 매년 여름. 겨울에 두세 달씩 해외에 나가 함께 취미(골프)생활을 즐기며 생활하다 들어온다"며 "앞으로도 주위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면서 보람된 삶과 노후를 살도록 노력 하겠다"고 강조했다. /강하현기자
2020년 1월 22일일 제 1032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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