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면에 이어 수요처방전 해설>
약 이름은 모르고, 약봉지 색깔만 안다. 병원에 다녀오면 약이 늘어난다. 어느 의사는 혈압을 잡고, 다른 의사는 혈당을 잡고, 또 다른 의사는 잠을 잡는다. 그러다 보면 환자는 약봉지를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병은 하나씩 진료받았는데 약은 단체로 입주한다.
“이 약은 무슨 약입니까?” 물으면 대답이 걸작이다. “아침에 먹는 하얀 약이요.”
하얀 약이 대한민국에 한두 개인가. 이름은 모르고 색깔만 기억한다. 약봉지가 바뀌면 기억도 함께 이사 가버린다.
나도 오랜 당뇨와 뇌출혈 후유증을 겪으며 약이 몸에 언제나 똑같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회복 정도와 식사량, 혈압과 혈당, 다른 약과의 조합에 따라 몸의 반응이 달라졌다. 어제 괜찮았던 처방이 오늘은 어지럼이나 설사, 지나친 혈압 저하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불편하다고 약을 제멋대로 줄이거나 끊어서는 안 된다. 환자가 할 일은 의사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몸의 변화를 기록해 의료진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종이 한 장이면 충분하다. 약 이름, 먹은 시간, 혈압·혈당, 어지럼이나 졸림 같은 변화를 적는다. 새 약이나 감기약, 건강기능식품이 추가되면 기존 약과 함께 확인한다. 여러 병원을 다닌다면 현재 먹는 약의 목록을 반드시 보여준다.
약봉지는 말이
없다. 그러나 몸은 계속 신호를 보낸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신호를 사흘 만에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지난번 약을 먹고 어떠셨어요?” 의사가 물으면 “그때는 좀 이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라고 답한다. 이쯤 되면 진료가 아니라 의사와 환자가 함께 벌이는 기억력 퀴즈다.
약은 기억으로 먹지 말고 기록으로 지키자. 의사에게 “알아서 잘해주세요”라고 몸 전체를 택배처럼 맡기지 말고, 내 몸에서 일어난 일을 한 줄이라도 들고 가자. 약 한 알은 의사가 처방하지만, 그 약을 먹은 내 몸의 이야기는 환자만 쓸 수 있다.
※ 근거 방향은 미국 국립노화연구소의 고령자 약물안전 권고처럼, 처방약·일반약·건강기능식품 목록을 의료진과 공유하고 이상 반응을 알리라는 원칙에 맞췄습니다. 미국 국립노화연구소 /정태영박사
1349호 2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