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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김부겸 긴밀한 관계 추측” 진술

유시민 진술서 전문 전격 공개
목포투데이 기자 / mokpotoday1@naver.com입력 : 2019년 0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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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투데이


유시민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김부겸 긴밀한 관계 추측” 진술
유시민 진술서 전문 전격 공개


<13면에 이어>
저는 그것을 구경하지 못했으므로 뭐가 뭔지 자세히는 모르나 이날 복학생총회에서의 시국성토와 교내시위가 다음날부터 정치문제를 들고 나올 수 밖에 없는 고조된 분위기를 만들어내었고 그에 따라 학생회는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다고 알고 있읍니다. 

②이날 즉 5월 1일 18:00부터 운영위원회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총학생회장 심재철(사대 영어과4)
부회장 김학진(공대 조선공학3)
인문대 학생회장 노창준(동양사3) 지명수배
사회대 〃 유승호(경제3)
경영대 학생회장 정철상(경영3) 지명수배 후 합수부 진술서 작성
법대 〃 이철우(법3)
사범대 〃 진영효(교육3)
공대 〃 양점식(3년)
약대 〃 김대중(3년)
자연대 〃 배명규(3년)
가정대 〃 김경미(의류3)
미대 〃 박종철
총여학생회장 이재인(교육3)

그리고 저 등이 있을 때 18:00시 조금 넘어 연성만(人文大) 지명수배 후 체포. 8.20. 공소취하로 석방, 심상환 지명수배(사회학과), 오세중(철학과) 등 복학생 6명 정도가 들어왔고 이때 심재철은 방문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별로 놀라는 기색없이 “어서 오쇼”하고 인사를 한걸로 보아 복학생과 심재철 사이에 미리 양해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명목상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사회를 보았으나 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 사람은 연성만(인문대)이었으며 심상환등 다른 복학생들은 다들 “병영집체훈련을 거부한채 민주화 투쟁을 벌이면 우리가 민주화투쟁에 대한 여론이나 국민들의 인식이 악화되므로 병영집체훈련거부는 깨끗이 철회하고 5월 2일부터는 교내시위를 벌이면서 비상계엄문제를 이슈화하자”는 주장을 하였는데 처음에 경영대 학생회장 정철상, 사범대 학생회장 진영효 등이 반대의 뜻을 보였으나 결국 설득당해 복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하였읍니다. 

이때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약 22:00경 이것을 먼저 신문에 발표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다른사람들 즉 운영위원이 아닌 저나 복학생들을 옆방인 집행부실로 퇴장시킨 후 운영위원들끼리 약 23:30까지 의논한 후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5월 2일 02:00경 한국일보 등 신문기자들에게 발표하였읍니다. 

또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여러개의 구호를 단과대학으로 배당하여 주었는데 예를 들어 「비상계엄해제하라」는 사범대, 「노동삼권보장하라」는 경영대, 「정부개헌 중지하라」는 법대 「유신잔당물러가라」는 가정대에... 이런식으로 각 단과대학 별로 구호를 하나씩 나누고 각 과별로 글 내용을 자유롭게 피켓 하나씩을 준비하게 하였읍니다. 이 비용은 모두 학생회비 및 과회비로 충당하였다고 알고 있읍니다.

③ 운영위원회의 이 결정은 4월10일 총대의원회의에서 가결한 병영집체훈련거부결의안과는 상호 배치되는 것이므로 운영위원회는 의장인 저에게 총대의원회의의 소집을 요구하였읍니다. 총학생회칙상 운영위원회가 소집을 요구하면 총대의원회 의장은 반드시 총대의원회의를 소집하여서 운영위원회에서 제출한 안건을 토의하여야 합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1.의 라. 학생총회 및 시위 사실)
그래서 5월2일 12:00시부터는 민주화대총회가, 11:30부터는 총대의원회의가 각각 아크로폴리스 광장 및 학생회관에서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1.① 5월2일 10:00부터는 각과별 반별로 과총회, 반총회를 열어 병영집체훈련응소 설득작업을 대의원 학생회간부들이 벌이고 12:00 인문대로부터 입장하기시작하여 하얀 가운을 입은 600여명의 남녀 의대생들이 마지막으로 「계엄해제」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입장하고 아크로폴리스 약 1300평의 광장은 12,000명의 학생들로 꽉 차버리고 말았읍니다. 

이 때 같은 시간 저는 총대의원회의를 열고 있었으므로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나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사회도 보면서 시국선언문도 낭독하였으며 구호를 선창하고 교내 순환도로를 일주하는 민주화 대행진을 총지휘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이때 낭독한 시국선언문은 총학생회장 자신이 작성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5월6일자 대학신문에 전문이 게재되었으며 내용은 역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하여서는 비상계엄이 해제되어야 하며 언론검열제도등의 모든 비민주적인 요소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었읍니다.

② 저는 11:30부터 학생회관 2층 라운지에서 운영위원회의 독선적인 응소결정을 지지할 것이냐 아니냐를 의제로 운영위원회 요구로 개최된 임시총대의원회의를 하다가 밖이 시끄러워 26동 대형강의실로 12:30경 옮겨 14:30까지 회의를 한 결과 96명의 참석자중 79명의 찬성으로 총대의원회의가 4월10일에 결의한 바 있는 병집거부를 철회하고 운영위원회의 결정을 지지하였읍니다. 대부분의 대의원들은 운영위원회의 독선을 비판하면서도 총대의원회가 그 결정사항을 부인하면 학생회가 두 쪽이 난다는 생각 때문에 찬성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③ 이날 14:00시~17::00시 사이 3시간에 걸쳐 교내 순환도로를 12,000명이 일주한 민주화대행진은 그 코스가 아크로폴리스→ 진입로 → 교문앞 → 기숙사앞 → 교련장 → 4.19탑 → 아크로폴리스의 순서였고 연극반의 징과 꽹가리가 힘차게 울리고 각 단대별로 하나씩 15개의 플래카드와 각 과마다 준비한 100여개의 피켓을 앞세우고 그 앞 뒤 행렬의 길이는 거의 1.5km 정도에 달하였고 각단과대학 별로 4.19탑에 묵념을 드린후 아크로폴리스로 집결하였읍니다.

④ 이때까지 지휘는 모두 총학생회장 및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이 맡았으며 대행진이 끝났을 떄 인원은 6000명 정도였는데 19:00시경 이 6000명의 학생이 다시 교문앞으로 집결하였고 이때부터 약 21:00시까지 「비상계엄해제」 「신현확 퇴진」 「전두환 되진」 「언론자유보장」 등을 주제로한 자유성토가 있은 후 약 21:00경 학생활동위원회(위원장 : 이홍동, 정치4)에서 준비해온 2개의 꼭두각시에 신현확, 전두환의 이름을 써서 교문에 매단 후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 화형식을 가졌읍니다.

이 화형식 준비는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 군의 지휘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저는 이 때 사회를 보았읍니다.

⑤ 철야농성을 하기 위하여 다시 21:00경 아크로폴리스광장에 모였을 때 인원은 약 3000명 정도 되었으며 식당에서 단대별로 차례차례 저녁식사를 한 후 역시 단과대학별로 도서관 6개방과 학생회관을 이용하여 철야농성을 시작하였고 농성시 토론의 주제나 구호의 내용은 낮시위때와 동일한 것이었읍니다.

⑥ 이날 17:00경 학생 6000여명이 다시 아크로폴리스에 집결하고 있을 때 총학생회장 심재철, 부회장 김학진 그리고 저와 그 외 2명 정도의 학생회간부들이 앞에 모여있는데 이해찬 심상환 등 3~4명의 복학생들이 콜라 5~6잔을 사왔고 그중 이해찬이 저에게 콜라를 주었으므로 제가 4월11일 일도 있고 해서 화해하느라 먼저 인사를 청하고 악수를 했는데 그때서야 저는 바로 그가 이해찬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제가 “일전에 다툰 일은 미안합니다”고 사과하자 이해찬은 일을 하다보면 그럴수도 있는 일이라면서 수고가 많다고 격려해주었읍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1.의 마. 서울대 시위사실)

1. ① 5월3일 오전에는 역시 전날과 동일한 구호를 외치며 교내 아크로폴리스광장 및 교문앞에서 시위, 연좌하였으며 다음날 문무대에 입소할 1학년생들을 입소준비할 시간을 주기위해 약 15:00경에 박수를 치면서 교문밖으로 내보내 1학년 약 1천여명은 그 때 귀가하였읍니다.

② 이날 13:00경 아크로폴리스에 약 4000여명의 학생이 운집해 있을 때부터 5월2일 오후2시경 4동 대형강의실에서 총회를 열고 학부 학생들의 교내 시위 및 철야토론 대회에 같은 과의 학부학생들에 섞여 약 500명의 대학원생이 참가하여 쭉 같이 행동하였읍니다.

③ 15:00시경 1학년을 내보낸후 약 3000여명이 교문앞에 연좌하면서 비상계엄해제. 과도일정단축. 언론자유보장 등을 요구하는 시국성토대회를 벌였으며 이 때 사범대학 학생회장이 사회를 보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정부개헌 중지하라” 등의 구호를 선창하였으며 18:30경 교문앞 성토대회를 마치고 다시 도서관과 학생회관에서 동일한 주제로 철야농성을 벌였는데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이 각 단대별 농성장에서 자기 단과대학소속 학생들을 지휘하였고 이때 농성인원은 약 2000여명 되었으며 21:30분경 고병익 총장님이 농성장을 둘러보겠다는 전화가 학생처장 이수성교수로부터 총학생회장실로 걸려왔으므로 제가 안내하고 총장 고병익 교수, 부총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각 단과대학 학장 등 약 십 여명이 농성장인 도서관과 학생회관을 둘러보았으며 이 때 총장님은 그냥 농성장에 들어가셨고 그러면 학생들은 박수를 쳤으며 총장님은 답례로 손을 잠깐 들어 보이는 정도였으므로 약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읍니다. 

④ 이날 밤 총 연극회 학생 약 10여명은 23:00시경 도서관과 학생회관에서 농성학생들이 보는 앞에 궁정동사건을 풍자한 연극을 하였읍니다만 저는 그 학생들의 이름은 알 수 없고 각 써클은 문예부 소관이므로 문예부장 권혁철(공대 전산3)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2.의 모 두 문무대 입소 환송식)
1. ① 5월4일 오전10:00시부터 교문앞에서는 일학년 병영집체훈련 환송식이 개최되었는데 여기에는 1학년생 약 2500명과 일반학생 약 3000며명등 5000~6000여명이 운집하였읍니다. 이때 사회를 본 것은 인문대 학생회장 노창준(동양사 3)이었고 그는 환송식이 시작되기 직전 “정의가”등의 노래를 선창하였고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선창하기도 하였읍니다. 

여기서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환송사”에서 “보다 큰 민주화투쟁을 위하여 입소하는 일학년에게 감사한다”고 했으며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는 이 때 일학년들에게 “민주화를 바라는 열망은 학생, 교수 모두가 꼭 같은 것이다. 대학의 파국을 막아준 여러분께 감사한다”고 말하였읍니다. 

② 13:00경 환송식이 끝나고 1학년들이 탑승한 버스가 교문을 나설 때 양쪽에 늘어선 300여명의 학생들은 애국가를 불러주었으며 버스에 탄 1학년생들은 “정의가”등의 노래와 “비상계엄해제”등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떠났읍니다.

③ 1학년들을 보내고 약 3000명의 학생들은 다시 아크로폴리스에 집결하여 농성해제식을 가진 후 15:00경 농성을 해제하고 집으로 돌아갔으며 이 농성해제식에서도 저는 목이 쉬어서 못하고 인문대학생회장 노창준이 사회를 보았으며 애국가를 부른 후 해산했는데 같은 시간에 교문앞에 있던 200여명의 전투경찰도 철수하였읍니다.

④ 같은 날 18:30경 총학생회장 심재철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 부회장 김학진 문예부장 권혁철과 제가 같이 봉천동의 한식집(한식집이름 미상)에서 생선찌개와 곱창을 시켜 저녁식사를 하고 소주 2병 정도를 마셨는데 저는 이때 워낙 피곤하였으므로 술은 한 잔 밖에 마시지 않았고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그동안 모두들 수고했다”면서 격려해주고 식사대 약 10,000원도 자기가 지불하였는데 그 돈의 출처는 알지 못합니다.

1. 5월2일~4일간의 농성기간 중 특히 중요한 것은 5월1일밤 갑자기 병영집체훈련 응소결정을 내린 학생회가 학생들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고 궁지에 몰려있던 5월2일 12:)0시부터 교내 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 일만이천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민주화대총회중 김부겸(복학생, 정치학과4)이 아주 탁월한 웅변력으로 “민주화투쟁을 위해 응소키로 한 총학생회의 결정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는 요지의 연설을 함으로써 일만이천 학생을 멋지게 설득하고 위기에 처한 총학생회를 구출해 주었기 때문에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많은 복학생중에서도 김부겸에 대해서 가장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형이 학생회를 살려줬다”라고 심재철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일도 있읍니다.

위 기간 중 농성비용으로 사용된 자금은 모두 총학생회 예산에서 지출된 것이며 특히 식사비는 제가 알기로 약 250만원 정도나 지출되었다는 이야기를 5월4일 농성이 끝난 후인 16:00경 총무부장 이용화군으로부터 들은 사실이 있읍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2. 모두 학생총회)
1. 5월6일 오후2시 4동대형강의실에서 저는 임시총대의원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총원 132명중 약 100명이 참석하였고 여기에서는 우선 농성비용등으로 학생회비가 너무 많이 지출되었으므로 1000원씩의 추가회비를 1인당 징수하여 민주화기금을 조성하자는 것이 가결되었고 서울대 사무처 학생과장이 합수부에서 경비지출 관계로 조사받고 진술서 씀

운영위원회의 독선을 막기위하여 운영위원 18人, 의장단(총대의원회의장과 단대의장) 16人, 복학생7人 이내로 구성되는 민주화투쟁위원회(가칭)를 결성하고 복학생은 표결권이 없이 고문으로 참석케 할 것을 의결하였읍니다. 1인당 1,000원씩의 회비는 각과별로 걷는 중이었고 민주화투쟁위원회(가칭)는 복학생들의 불참통고와 의장들의 저조한 참석률로 인하여 결성조차 되지 못하였읍니다. 복학생들은 불참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고 단지 그런 식의 기구에 참석할 수 없다고 주장하더란 이야기를 5월7일경 총학생회장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읍니다.

1. 5월7일 15:00 ~ 5.8 10:00시 사이에는 사범대 인문대 약대의 공동시국성토 및 교내시위 철야토론대회가 있었으며 참가인원은 약 1500명 주제는 “비상계엄은 왜 해제되어야 하는가”였다고 알고 있으며 저는 참석치않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2. 5월8일 15:00 ~ 5월9일 10:00시 사이에는 법대 경영대 미대의 공동 시국성토대회 및 자유언론 쟁취대회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개최되었고 이때 송건호 씨와 해직기자들이 참가하였다고 알고 있으며 학생회관에서는 철야토론회가 약 1000명 정도가 참가한 가운데 열린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자세한 것은 제가 참석치 않아 알 수 없읍니다.

1 ① 5월9일 15:00시 ~ 5월10일 10:00 사이에 공대 음대의 시국성토 및 교내시위 철야토론회가 있었고 참가인원은 약 1500명 주제는 「비상계엄해제」와 「정부개헌 반대」등이었다고 알고 있으며 농성장은 학생회관이었읍니다.

② 같은날 17:00부터 문무대에 입소한 1학년생 위문이 있었으므로 총학생회장은 같은 날 17:00부터 고대 학생회관에서 있을 예정이던 서울시내 대학 총학생회장단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으므로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과 제가 회의에 참석하였읍니다. 

이 회의는 5.9 17:00시 ~ 5.10 05:00 시 사이에 고대 학생회관 3층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는데 서울대 고대 연대 이대 성대 서강대 건대 숙대 동국대 숭전대 서울여대 성신여대 외국어대 전북대등 주로 서울시내 약 20개 대학의 총학생회장단이 모였는데 사회는 고려대 학생회장 신계륜이 맡았으며 이 회의에서 채택된 현시국에 관한 제2차 공동성명서의 초안도 고려대학교에서 작성하였고 그 내용은 역시 “비상계엄 해제” “정부개헌 중지” “언론자유보장” 등이었읍니다. 이때 건국대 총학생회장을 비롯하여 많은 총학생회장들이 서울대에서 괜히 무책임하게 “14일 휴교령이 내리면 15일 오후3시 영등포로터리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겠다”고 5월2일 심재철이 발표하여 이 말이 휴교령에 관계없이 무조건 15일 가두시위를 벌이겠다는 것으로 와전되어 터무니없는 “15日 봉기설”이 나돌게 되었다고 공격했읍니다.
그러나 휴교령이 내릴 경우 그 다음날 가두시위를 벌인다는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의 5월2일 발표에는 별 이의가 없었고 강남 강북 강동지역의 학교들끼리 모여 의논한 끝에 만일 휴교령이 내리면 강남의 대학은 영등포로터리에, 강북은 공덕동로터리, 강동은 청량리와 서울운동장의 2곳에 오후 3시 집결키로 결의되었읍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2.가 학생회장단 회의)

1. 5월11일 15:00시 ~5월 12일 05:00시에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소회의실에서 서울대 주최로 서울대 고대 연대 성대 서강대 건대 중앙대 외대 숭전대 명지대 국민대 이대 숙대 서울여대 성신여대 대유공전 등 주로 서울시내 약 2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회의를 열었으며 주최학교인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인 심재철은 5월9일 고대회의에 불참하였기 때문에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 지명수배됨.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판결문에 증거의요지로 판시됨. 

이 사회를 보았고 2명 이상 참석한 학교에도 발언권은 한사람에게만 허용되었읍니다. 처음 서울대에서는 총학생회장 심재철, 부회장 김학진, 총대의원회의장 류시민,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 등 4명이 참석하였으나 발언권이 심재철에게만 있었으므로 저는 계속해서 회의에 참석치는 않고 들락날락하여서 자세한 회의의 전개는 알 수 없으나 이날 회의는 내용상 심재철 신계륜 등의 주도하여 4개항의 결의사항이 채택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 결의문은 5월12일 09:00시 서울대총학생회장실에서 기자들에게 배포되었읍니다.

 결의문의 내용은 ① 15일 가두시위설을 공식부인하고 교외시위는 자제되어야 한다는 것 ② 申 총리와의 TV 생방송대담을 제의 ③ 휴교령을 반대하며 휴교령이 내릴 시 과감히 싸울 것이라는 것 ④ 5.16 15:00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전국대학대표자회의 소집을 결의한다는 것이었읍니다.

1. ① 5월12일 09:00시경 본부 학생처장실에서 제가 학생처장 이수성교수를 만나 5월11일 15:00시 ~ 5월12일 05:00에 있었던 서울시내 총학생회장단회의 결과를 이야기하고 15일 가두시위설을 부인하는 총학생회장단회의 결의문을 전달하자 이수성교수는 문교부차관실로 전화를 건후 “문교부에서는 벌써 이 결과를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하며 이제 휴교령 걱정은 없어진 셈이라고 말한 적이 있읍니다.

② 5월12일 15:00시 ~ 21:30 사이에는 사회대 자연대 가정대의 연합 시국성토대회와 교내시위가 아크로폴리스광장 및 교문에서 있었고 진행은 사회대 학생회장 유승호, 자연대 학생회장 배명규. 가정대 학생회장 김경미가 공동으로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저는 11밤 철야회의로 피곤해서 오후에는 학생회관 라운지 소파에서 낮잠을 잤으므로 자세한 진행상황은 모르나 주제는 「노동3권보장」 「농민권익보장」 「물가고의 원인」등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낮잠을 잔 후 17:00부터 총대의원회 사무실에서
사회대대의원회의장 유현오(사회3)
인문대 〃 조병식( 3)
경영대 〃 송덕호(경영3)
법 대 〃 이승관(법 3)
사범대 〃 황원기(지학3)
공 대 〃 윤치은(화학공학3)
자연대 〃 신영길( 3)
약 대 〃 류재하(제약3)
가정대 〃 황선유( 3)
의 대 〃 최병순(본과3)
등과 함께 총무부장 이용화군으로부터 1학기(예산 총 1억1천만원규모) 예산편성표 설명을 듣고 예산심의절차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데 약 21시경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저를 찾는다 하여 나가보니 총학생회장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운영위원들이 허겁지겁 복도를 빠져나가고 있었고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복학생 김병곤(경제4)은 저에게 「계엄군이 13일 00:00시 ~ 03:00시에 수도권을 접수한다. 그리고 휴전선부근에 긴장이 있다. 이사실은 방송국에서 확인된 것이다」
라고 하면서 학생회관 2층 라운지의 농성학생 뒤처리를 저에게 맡긴 후 총총히 복도를 빠져나갔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총대의원회 사무국실의 단과대학의장들에게 전하고 의장단회의를 해산시킨후 21:10경 학생회관 2층 라운지로 건너가 농성중이던 약 1000여명의 학생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각 과별로 모아 21:30경에는 거의 해산시켰읍니다. 그때 저와 함께 학생들을 해산시킨 운영위원은 자연대 학생회장 배명규가 있었습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2.의 가. 문부대 퇴소환영식)

1. ① 5월13일 11:00 ~ 13:30 사이 교문 앞에서는 문무대를 퇴소하는 1학년 퇴소환영식이 개최되었는데 약 4000여명의 학생이 집결하였는데 연사들은 하나같이 12일 밤 계엄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확인도 제대로 않은 채 도망친 학생회간부의 비겁함을 비난했으며 다시한번 총학생회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읍니다.

2. 이 때 연설을 잘하는 김부겸이 다시 등장하여 “학생회가 잘못한 점이 있기는 하나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또 총학생회의 잘못이 아니라 복학생들이 소위 통박을 잘못 굴려서 그랬다”고 말하여 총학생회를 다시 한 번 구제해 주었으며 그의 말로 미루어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김부겸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지 않나 추측됩니다. 그러나 폭락한 총학생회의 인기와 권위는 다시 세울 수가 없었으므로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15일 학생총회에서 가두 진출 여부를 결정짓겠다”고 발표하였읍니다.

② 이 날 22:00부터 고대 학생회관에서 고대가 주최가 되고 역시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서울대 고대 연대 성대 서강대 건대 중앙대 외대 숭전대 명지대 국민대 한양대 이대 숙대 덕성여대 성신여대 서울여대 총신대 서울신대 등 7개 신학대학을 합쳐 약 25개 대학총학생회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읍니다. 

이날 서울대 총학생회장실에서는 18:00부터 가두시위 실행여부를 놓고 운영위원회가 열렸고 제가 고대에 가기위해 21:30경 학교를 나설 때 분위기는 가두시위쪽으로 흐르고 있었으며 총 학생회장 심재철은 최고책임자가 남아서 우리학교 거취를 오늘밤에 결정하겠다면서 저 혼자 고대로 가라고 부탁하였읍니다. 

그래서 저 혼자 22:30경 고대에 도착해보니 이미 회의가 시작되어 있었고 제일 먼저 연대 대표(총학생회장 박광호가 아니었읍니다)가 13일 연대의 신촌 및 광화문 가두시위 상황보고는 하면서 “연대가 제일먼저 십자가를 진셈이고 우리는 죽을 때 까지 싸울테니 타대학도 이때 같이 가두시위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은 “이미 내일(14日) 11:00시 고대로 가두시위를 결정해 놓았다”고 이야기 했으며 외대 중앙대 명지대 등 다수의 학교들이 언제든지 가두로 나올 수 있다고 하였읍니다. 

대세가 그쪽으로 기울자 저는 학교를 떠날 때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아무래도 가두로 나가야 할 것 같으니 가 보고 대세가 기우는대로 결정하고 오너라.”고 귀띔한대로 “타대학이 모두 나간다면 우리는 15일날에 가두로 나가겠다. 왜냐하면 14일은 일학년생들이 문무대훈련의 피로를 씼느라 학교를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서울大도 15일에는 가두시위를 하겠다고 말하였읍니다. 

뒤늦게 숙명여대 총학생회장 형난옥이 너무 성급한 짓이라고 이견을 내놓았으나 연대쪽의 강한 반발과 이미 기울어진 대세 때문에 역시 가두시위를 하기로 하였읍니다. 이 회의는 14일 05:00시에 끝났습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2.의 가. 및 15.의 가두 시위사실)
1. ①5월 14일 07:00경 학교로 돌아와보니 운영위원회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총학생회장단회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저는
총학생회장 심재철(사대 영어과4)
부회장 김학진(공대 조선공학3)
인문대학생회장 노창준(동양사3)
사회대 〃 유승호(경제3)
경영대 〃 정철상(경영3)
공대 〃 양점식( 3)
자연대 〃 배명규( 3)
등이 있는데서 회의 결과를 보고하자 운영위원들은 하나같이 “오늘(14日) 나가면 휴교령이 내릴텐데 내일(15일)까지 미룰 수 없다며 총학생회장 심재철을 중심으로 교문돌파계획을 짰고 저는 약 10:30까지 눈을 붙였읍니다. (총여학생회장실 소파에서) 

② 11:00시 경부터 단과대학 학생회장의 지휘아래 단대별로 아크로폴리스에 집결한 인원은 7000명 정도였으며 그중 음대 미대는 낙성대쪽 후문, 공대 법대는 귀가하는 듯이 학교를 나가 봉천동4거리, 신림동4거리에서 12:00경부터 집결시위하도록 되어 있었고 가정대 여학생들은 공대 공사장 쪽에서 돌을 주어 날랐읍니다. 

저는 이 학생총회에서 사회를 보면서 13일 밤 고대회의 결과를 보고하였고 대다수 학생들이 박수를 쳤고 총학생회장인 심재철은 간단한 가두시위 선언을 하였읍니다. 심재철의 가두시위선언이 끝난 11:30경 저는 마이크를 들고 모든 학생들이 교문으로 힘차게 뛰어갈 것을 지시하였읍니다. 이때 학생들이 막 아크로폴리스를 빠져나갈 즈음 학생처장 이수성교수가 총학생회장 심재철에게 “학생들의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라는 평소의 주장대로 “교수들이 중재를 해서 학생과 경찰의 피흘림이 없는 평화적 가두시위를 할 수 있도록 교섭할테니 30분간의 시간을 달라”고 하였으나 학생들은 그것이 불가능한 제안이라고 하며 무시하고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교문앞의 약 200여명의 전투경찰 지휘자에게 길을 비켜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11시 50분경부터 두 대의 페퍼포그 차가 맹렬히 뿜어대는 페퍼포그와 최루탄터지는 소리, 최루탄 연기 자욱한 가운데 돌이 나르기 시작하였고 약 40분간의 투석전 동안 무수한 돌멩이와 페퍼포그가 오간후 약 12시 30분경 경찰이 저지선을 풀어주었읍니다. 

부상자가 속출하자 (나중에 듣기로 약 30명의 경찰이 부상당하였다함) 교문에서의 저지선을 하는 수 없이 뚫어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후 신림4거리에서 약간의 충돌이 있었으나 별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독산동을 거치거나 대방역을 거쳐 14:30경에는 영등포시장 앞에 서울대생만 5000여명 영등포역앞에 중앙대 숭전대등과 섞여 서울대생 약 3000여명이 집결하여 있었읍니다. 

교문을 출발한 후 외친 구호는 “비상계엄해제” “신현확, 전두환 퇴진” “정부개헌 반대” “언론자유보장”, “농민권익보호” “서민생활보호” “노동3권보장” 등 5월2일 총학생회운영위원회에서 각 단대별로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하나씩 나누어 준 구호였으며 “정의가” “흔들리지 않게” “횟불” 등의 노래를 불렀읍니다.

<다음 면에 계속>

제997호 2019년 5월 15일 14면


목포투데이 기자 / mokpotoday1@naver.com입력 : 2019년 0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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