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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복지의 역사를 간직한 곳 / 공생원
110년 지켜온 신념, 공생원 설립 91주년 기념식 열린다
설립자 ‘거지대장’ 윤치호 선생의 탄신 110주년 추도모임도 함께 가져
‘공생’이란 문자 그대로 단순하게 본다면 ‘더불어 산다’, ‘같이 산다’, ‘함께 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개인주의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공생은 점점 실천하기 어려운 단어가 되어가고 있지만 목포에는 110년동안 이 단어를 지켜온 재단이 있다.
대반동에 위치한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에서 오는 10월 18일 공생원 설립자 윤치호선생의 탄신 110주년을 기념하는 추도모임 및 공생원 설립 91주년 기념식을 함께 갖는다.
행사는 신안비치호텔 2층 홀에서 오전 10시 30분부터 3부로 나뉘어 진행되며 별도 프로그램으로 오후 2시부터 신안비치호텔 10층에서 제11회 사회복지 전문직 육성 국제교류 세미나를 개최한다. 재단의 역사를 보면 이번 행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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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윤학자 부부의 결혼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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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대장 윤치호선생
1909년 전남 함평군 옥동마을에서 태어난 윤치호선생은 그저 평범한 시골 농부의 아들이었다. 이 마을에 마틴이라는 선교사가 찾아오며 그의 인생이 바뀌어 갔다. 당시 12살인 윤치호가 선교하는 마틴을 따라다니며 기독교에 심취하고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선교를 따라다닐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마틴 선교사가 교회를 짓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돕는 등 앞장서 그녀를 도왔던 그에게 마틴은 서울의 신학교 입학을 권했다.
그렇게 신학교 목공과에 입학해 나사렛 같은 목수가 되어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 꿈꾼 목공과 다닌 후 19살에 다시 학교를 다니며 전도사의 길을 걷는다.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목포에 왔던 그는 현재 북교초등학교가 위치한 자리에서 다리 밑에 아이들을 발견했다.
그 아이들은 갈 곳 잃은 고아들이었다. 윤치호는 그 아이들을 위해 기도드리고 밥을 내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의 공생원이 설립된 것이다. 7명의 고아들로 출발한 공생원은 점점 수가 늘어나더니 더 이상 나누어줄 음식이 부족했다. 윤치호는 식당을 돌며 잔반을 얻어 아이들의 식사를 해결했고 그 모습을 본 목포시민들은 그 모습을 보고 그를 ‘거지대장’이라 불렀다.
전쟁이 일어나며 전쟁고아들이 공생원에 모여드니 이곳엔 400명이 넘는 고아들이 머무르게 되었다. 전쟁을 겪은 아이들이 모이니 정서적인 불안을 표출하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윤치호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로 해 친분이 있던 목사님을 통해 정명여자고등학교에 당시 음악 선생님으로 계신 분을 소개받는다.
조선총독부 관리의 딸이었던 일본인 음악 선생님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어린나이에 목포로 와 학창시절을 모두 목포에서 보낸 분이었다.
그 분의 도움으로 윤치호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칠 수 있었고 아이들을 가르치던 음악 선생님을 보고 공생원을 운영하는 일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아이들에게는 어머니가 필요하구나.’라고 느낀 것이다. 윤치호는 일본인 음악 선생님 다우치 치즈코에게 청혼을 했다. 두 사람이 결혼한 후 치즈코는 윤치호의 성을 따라 윤학자라는 한국 이름으로 개명했고 ‘한국 고아의 어머니’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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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학자 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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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아의 어머니 두 사람이 결혼한지 12년이 되는 해에 윤치호가 당시 광주광역시에 자리 잡고 있던 전남도청으로 길을 나선 후 행방불명 됐다. 두 사람에겐 아들 2명과 딸 2명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키울 방이 없었던 부부는 고아 400명과 아이들을 함께 키웠다. 첫째아들 윤기 이사장은 “넌 진짜 아들이 아니야”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며 아직도 어린시절 고아들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고 했다. 윤치호가 행방불명 되고 윤학자의 부모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오라고 설득했다.
부모님의 간절함에 윤학자가 일본으로 갔지만 아이들을 버릴 수 없어 다시 목포로 돌아와 생의 마지막까지 아이들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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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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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대장의 아들
윤학자가 별세 후 공생원은 장남 윤기가 맡아 운영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26세였다. 음악을 통해 아이들의 정서안정에 노력했던 부모님의 운영방식을 이어받아 그는 고아들로 구성된 ‘수선화합창단’을 만들어 한국과 일본 전역을 오가며 공연했다. 대부분 사회복지시설에서 공연했는데 고아들로 구성된 합창단이라는 점에서 큰 찬사를 받았다.
그 중 한 시설에서 공연을 했을 때 한 여인을 만난 윤기는 일본공연의 통역을 부탁했다. 이 여인은 윤기가 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보고 제안을 수락한다.
이 여인은 윤기와 결혼하여 현재까지 함께 사회복지에 헌신하고 있다. 윤기는 공생원을 운영하던 중 더 큰 꿈을 갖게 된다. 일본의 제일교포들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는 일이었다. 꿈을 위해 공생원을 딸에게 물려주고 일본으로 떠나 많은 사람들의 후원으로 ‘마음의 가족 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이 재단이 설립한 고향의 집에서는 제일교포 1세 할머니들이 머물고 있으며 일본 전역에 5개 지역(오사카, 고베, 교토, 도쿄, 사카이)에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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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학자여사 탄신 100주년 행사에서 수선화합창단이 공연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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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공생원
일본인 여성이 한국 고아들을 끝까지 돌본 이야기는 일본에서도 유명하다. 방송을 탄 윤학자의 이야기가 일본에 퍼지며 일본인들의 도움의 손길이 늘어났다.
현재 공생원의 모든 건물은 일본인들의 도움이라고 한다. 또 윤학자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모두 훈장을 받았으며 국가에서 ‘한국 고아의 어머니’라고 직접 지정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이 ‘어머니의 상’에 가장 어울리는 여성을 찾는 설문조사를 했을 때 윤학자가 가장 다수의 표를 받으며 이 상을 수여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상을 받기 몇일 전 윤학자가 별세했다.
경향신문은 ‘어머니의 상’을 대신해 공생원 정원에 ‘어머니의 탑’을 세워주었다. 공생원은 인간존중의 복지와 이용자 중심 복지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국제협력을 통한 복지선진화에 앞장서고 있어 일본인 관광객들이 목포에 오면 꼭 둘러본다는 관광명소로 많은 일본인들이 윤학자의 흔적을 찾아 방문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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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향의 집에서 열린 아리랑 공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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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복지재단, 뉴욕에 가다
UN 청사 옆이 일주일동안 시끄러웠다. 공생복지재단이 뉴욕으로 가 노인, 아동,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벌였기 때문이다. 재단이 뉴욕까지 날아가 행사를 벌인 이유는 ‘세계고아의 날’ 청원을 위해서였다.
이들은 세계고아의날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고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아 없는 세상은 불가능하지만 국제사회가 선의로 협력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일이다.
추진위원회 홈페이지엔 “세계 고아의 날이 제정되어 지구촌에서 고통받는 고아들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실천적으로 지원하여 사회적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이루어내기를 희망한다”고 쓰여 있다.
공생복지재단은 지난 해 1월 이사장 신승남, 회장 윤기, 상임이사 오병인, 이사 고석규 국방현 김성이 전석홍 정애라 조생구 양미경 형광석, 감사 김상선 윤충상, 윤학자 공생재단 이사 권 효가 취임하여 힘찬 도약을 다짐했다.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소개
모두가 행복하게 더불어산다는 ‘공생’이라는 단어를 실천하는 복지재단으로 윤치호선생이 설립하여 올해 91주년을 맞았다.
재단 소속 시설들로 3천여 명의 고아들과 더불어 살며 윤학자 여사가 가꾸어 온 공생원, 지적장애인과 교사들이 함께 생활하며 재활의 꿈을 키워가는 공생재활원, 중증장애인들의 요양과 의료 및 물리치료를 통해 장애의 더 큰 심화를 막고 잠재력 개발을 도와 재활 가능성을 제시하는 목포장애인요양원,
장애인들의 자립생활과 직업생활이 가능하도록 직업재활교육을 실시해 기능적인 기술습득 과정을 높여 경제적 자립도를 높여주는 무안자립원, 장애인 직업재활서비스 및 보호고용을 통해 중증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예손자립원, 신흥어립이집,
친부모의 사정으로 친가정에서 자랄 수 없는 아동에게 일정기간 위탁가정을 제공하여 상담·교육·홍보지원 사업 등을 펼치고 있는 아동복지시설 전라남도가정위탁지원센터가 있다.
특히 공생원 부지에는 공생원 제3대 윤기 원장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 ‘후쿠다 후미에’를 축하하고 격려하기 위해 오사카 시민의 모금으로 지어진 오사카 사랑의 집과 대반동 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건립한 창립 20주년 기념비, 목포시장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사랑의 가족 기념비,
윤기 회장이 일본방송 NHK에 출연하여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한 말에 감동 받은 일봉항공사 JAL회장 ‘마츠오시즈마’가 기증한 JAL하우스,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에 선정된 윤학자가 타계하자 경향신문사가 원내에 건립한 헌창비인 어머니의 탑과 일본 총리가 기증한 매화나무, 목포항 화륭선 선원들과 대반동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던 우물 사랑의 샘,
윤학자가 일본 교회의 지원을 받아 완공하여 만년을 보냈던 주거동을 게스트하우스로 활용중인 윤학자관, 공생원 설립 87주년을 맞아 설립자 윤치호의 공생정신을 퇴새기며 국가보조금과 많은 후원자들의 따뜻한 성원으로 아동숙사가 된 윤치호관,
윤치호의 손으로 창틀까지 만들어져 완공직전이었지만 한국전쟁으로 중단돼 윤학자가 1961년에 준공한 건물을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윤치호·윤학자 기념관이 있다. /이진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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